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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이야기][1] 바둑 삼국지
오늘날 바둑은 약 80개국에 보급되어 있습니다. 서양인들도 바둑을 즐기며, 크고 작은 바둑대회를 많이 개최합니다. 그런데 현대 이전까지는 바둑이 주로 한•중•일 3국에서 애호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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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이야기][2] 고대 중국의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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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모델
17세기에 들어와 일본은 명인기소를 둘러싼 경쟁을 하면서 바둑기술이 크게 진보하였습니다. 명인기소를 차지하기 위하여 혼인보가, 이노우에가, 야스이가, 하야시가의 네 바둑가문이 치열한 기술경쟁을 벌였습니다.
이 시스템은 무협지와 비슷합니다. 무협지에서는 흔히 무림맹주 자리를 놓고 소림파, 무당파, 아미파와 같은 문파들이 경쟁을 하죠. 무림맹주로 뽑히면 전체 무림을 지배하는 제왕이 됩니다. 무협지의 방주들처럼 일본의 각 바둑문파에서는 제자들을 양성하며 바둑맹주가 되기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무림맹주 격인 명인(名人)을 뽑는 어성기(御城碁)는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임석한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대통령이나 수상이 보는 앞에서 시합을 한 셈입니다. 이 때 장고(長考)를 너무 많이 하면 바둑수를 쇼군에게 보여주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전에 바둑을 두어놓고 쇼군 앞에서는 복기를 하는 식으로 두기도 했다고 합니다.
바둑맹주 혼인보가
4대 가문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문파는 ‘혼인보가’입니다. 혼인보가에서는 기성(棋聖)으로 추앙 받는 도사쿠, 슈사쿠 등 뛰어난 고수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도사쿠가 개발한 ‘수나누기(바둑수 분석법)’는 현대의 기사들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사쿠 다음으로 슈사쿠 기성도 유명합니다. 슈사쿠가 ‘영원불멸의 호수’라고 한 마늘모수는 오늘날 인공지능에 의해 그 가치를 새로이 인정받고 있습니다.
명인기소 시대에 가장 뛰어난 기사를 꼽는다면 도사쿠 명인이 첫손에 꼽힐 것입니다. 도사쿠는 워낙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아무도 도전장을 던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혼인보가의 가주였던 도에쓰는 자기가 두었던 바둑을 제자인 도사쿠와 함께 복기를 했다. 도사쿠는 스승이 둔 수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그의 논평은 핵심을 찔러 과거의 수법에 구애받지 않고, 구상은 자유로운 천지를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것이었다. 신선하면서 무게가 있는 제자의 논평에 도에쓰는 눈앞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그런가? 그 같은 사고방식도 있었구나. 내가 두었던 방법은 부분에만 집착한 느낌이 없지 않구나. 도사쿠, 너는 천재야. 앞으로 바둑은 너에 의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야.” (소설로 읽는 일본 바둑사)
이 일화를 보면 스승인 도에쓰가 제자인 도사쿠에게 새로운 사고방식을 배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프로기사였던 문용직 박사는 이것을 ‘패러다임 혁명’이라고 설명하며, 이 시기에 과거의 힘바둑에서 구조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둑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킨 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도사쿠는 어떻게 패러다임 전환을 할 수 있었을까요? 도사쿠가 당시의 바둑연구에 관한 기록을 남겨두었다면 정말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무렵 각 문파에서는 자기 문파의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금기시할 만큼 폐쇄적이었습니다. 바둑에 관한 책을 내는 것도 금지했으니, 도사쿠도 어떤 기록을 남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치열한 승부경쟁으로 특징지어지는 명인기소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바둑기술은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나온 고수들의 주옥같은 기보(棋譜)가 전해지며, 일본은 훗날 ‘이적의 묘수(귀가 빨개진 묘수)’, ‘토혈지국(피를 토한 바둑)’ 같은 흥미롭고 가슴 울리는 콘텐츠를 만들어 세계로 확산시킵니다.
이 무렵 한국의 바둑기술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1620년경 조선의 이약사(李礿史)라는 고수가 일본에 가서 초대 혼인보 산사와 세 점으로 대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약사는 산사에게 참패당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조선에서는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강자이다. 그런데 석 점이나 놓고서도 참패하다니…. 참으로 일본은 바둑의 나라요, 산사는 명수라 아니할 수 없구나.”
이약사는 귀국한 다음 바둑판과 바둑돌, 그리고 ‘건곤굴(乾坤窟)’이라고 쓴 액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조선의 최고수가 일본 최강자에게 석 점 접바둑으로 졌으니, 실력 차가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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