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 사람들이 출처를 잘 모른 채 종종 사용하는 ‘위기구품’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바둑의 등급을 9단계로 분류한 것이다. 프로기사에게 면장을 줄 때 1단, 2단과 같이 부르면서 이와 함께 위기구품에서 정한 등급의 명칭을 넣고 있다.
위기구품에서 최고 단위인 9단은 입신(入神)이라고 불린다. 맥심배 ‘입신최강전’이란 기전이 있는데, 이 시합은 9단들만 참가하는 대회이다. 입신이란 기량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 오늘날 입신이란 칭호는 인간을 처참하게 꺾은 인공지능 바둑에게 붙여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관행적으로 여전히 9단을 입신으로 부른다.
위기구품의 단계별 칭호와 내용은 표와 같다. 이것은 ‘바둑월드’라는 사이트에 나온 내용을 축약한 것인데, 영어식 표현이 더 쉽게 이해되는 것 같다.
품계 | 단위 | 경지 | 영어식 품계 |
입신(入神) | 9단 | 인간의 역을 넘어 가히 신(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 Grand Master |
좌조(坐照) | 8단 | 앉아서도 모든 변화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다. | Master |
구체(具體) | 7단 | 바둑의 기술이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 Perfect |
통유(通幽) | 6단 | 바둑의 참맛을 음미하는 그윽한 경지에 이르렀다. | Profound |
용지(用智) | 5단 | 이제는 싸우면서 지혜(智慧)도 쓸 줄 안다. | Wise |
소교(小巧) | 4단 | 소박하지만 기교(技巧)를 부릴 줄 안다. | Skillful |
투력(鬪力) | 3단 | 힘이 붙어 싸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 Fightable |
약우(若愚) | 2단 |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기략(機略)을 갖추었다. | Tactful |
수졸(守拙) | 1단 | 졸렬하지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 Defensible |
위기구품은 중국의 바둑고전인 <기경13편>의 ‘품격편’에 나온다. 일설에 의하면 남북조 시대 때 바둑을 애호한 양무제가 만들었다고 한다.
위기구품은 오늘날처럼 바둑실력을 급과 단으로 실력을 나눈 것이 아니라, 각 단계별 특징을 두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맨 첫 단계가 졸렬하지만 자신은 지킬 줄 안다는 ‘수졸’에서 어리석지만 기략을 아는 ‘약우’, 힘이 붙어 싸울 줄 아는 ‘투력’ 등으로 올라간다. 다음은 소박한 기교, 지혜 사용, 유현한 경지, 기술 완성으로 나아간다. 8단계에서는 앉아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경지에 이르고, 마지막 단계가 신의 경지인 입신이다.
기경13편의 ‘품격’편에는 각 단계의 특징을 부연설명하고 있는데, 좀 특이한 점이 있다. 하나는 2단인 ‘약우’에 관한 설명이다.
“포치(포석)할 때 보면 비록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세가 충실하여 범할 수 없다. 소위 ‘시작은 처녀 같아 적이 문을 열지만, 나중에는 달아나는 토끼와 같아 적이 감히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홍경령 역)
좀 알쏭달쏭한 표현이다. 요점은 겉보기엔 어리석어 뵈지만, 실은 기본기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다음의 내용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나면서부터 아는 자는 뛰어난 부류의 사람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중간쯤 가는 사람이며, 힘들게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 가는 사람이다.’고 했다. 입신, 좌조, 구체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들의 바둑이고, 통유, 용지, 소교는 배워야 아는 사람들의 바둑이며, 투력, 약우, 수졸은 힘들게 배워서 아는 사람들의 바둑이다. 이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비록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성공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기경13편의 편자인 장의의 견해일까? 위기구품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 사람을 재능에 따라 세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다. 재능 없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주장인데, 과연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세 부류 다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는 에디슨의 명언과 같은 결론이다.
위기구품을 보면 고대 중국에서 바둑실력의 등급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경13편에서는 이것 말고도 상수, 중수, 하수의 기술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다.
바둑기술이론이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 수준을 구분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분야든 실력 수준을 단계별로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바둑 분야에서는 표준화된 기력검사를 만들지 못해 기력 수준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위기구품처럼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의 수준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생각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어떤 목사님은 신앙의 수준을 바둑의 기력 단계에 비유해 설명하기도 했다.
'바둑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둑이야기] [14] 작은 공간에 우주를 담다 (0) | 2023.06.01 |
---|---|
[바둑이야기] [13] 바둑 3단계 (0) | 2023.05.22 |
[바둑이야기] [12] 프로기사의 별명 (0) | 2023.05.12 |
[바둑이야기] [11] 바둑은 왜 재미있을까? (0) | 2023.05.06 |
[바둑이야기] [10] 행마가 뭐지? (0) | 2023.04.29 |
댓글